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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관계

사랑과 사람에 대한 환상

Brida1208 2020. 4. 12. 16:12




사랑과 사람에 대한 환상

상담을 하다보면 가끔 여성 내담자가 아버지의 외도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낼 때가 있다. 딸로서 아버지가 바람을 피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 사람마다 각각 다른 반응을 보이기는 하지만, 보통은 충격에 빠지고, 배신감을 느끼고, 실망을 하게 되며 심지어 ‘혐오스럽다’는 표현을 하는 내담자도 있었다. 아버지가 딸을 도덕적으로 엄격하게 대했거나, 둘 사이에 정서적인 소통이 잘 안 되는 관계였던 경우에 딸의 충격은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아버지의 외도를 목격하며 자라온 딸의 경우, 딸 자신의 연애에서도 상대가 외도를 하게 되는 일이 더 빈번하게 발생하게 된다. 내가 만났던 한 여성분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평생을 외도와 폭력으로 어머니를 힘들게 했었는데, 그걸 목격하고 자란 본인도 결혼 생활 내내 남편의 외도와 폭력으로 마음이 시커멓게 되어 버린 채 살고 있었다. 나로서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 옆에 남아있게 된다는 점이었다.

 

바람을 피운 사람 옆에 남아있던지, 떠나던지 외도는 상대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바람을 피운 사람이 아버지이든 어머니이든, 애인이나 배우자이든 알게 된 사람에게는 충격과 상처를 남기게 된다. 어떤 사람은 별로 충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깊게 대화를 나누다보면, 너무 놀라고 당황스럽고 받아들여지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괜찮은척 하고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일을 겪게 되면 어떻게 무너진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을까. 참 어려운 부분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문화에서는 외도가 ‘배신’의 상징이기 때문에 상처와 충격은 너무 자명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타인으로 인해 내 마음이 무너지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너무 속상한 일이다. 특히나 외도에 대해 스스로 더 경계하고, 절대 그런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경우에는 상대의 바람에 대해 결코 쿨해지기가 어렵고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걸 알게 되면 배신감과 분노감에 고통스러워하며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누군가가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사실 환상이지 않을까? 우리 가족 중에 절대 그런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내 남편은 절대 한눈팔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사랑이란 언제나 지속되는 아름답고 달콤하기만 한 것이라고 믿는 것은?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절대 상대를 배신하면 안된다고 믿는 것은? 나는 절대 누군가를 두고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이런 생각들이 견고한 사람일수록 관계에서 불만을 더 많이 느끼게 되고, 갈등이 발생했을 때 회복하거나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고통 받으며 그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것 같다.

 

나에게도 '사람, 관계, 사랑'에 대한 수많은 환상들이 있었다. 서로 사랑한다면 상대에게 맞춰줄 수 있고 노력으로 모든 문제를 극복해낼 수 있다는 환상,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나를 두고 바람피우지 않을거라는 환상, 나를 사랑한다면 나와 항상 함께 있고 싶어 할 것이라는 환상, 나를 사랑한다면 나와 대화하고 싶고 나를 아껴줄 것이라는 환상. 이런 환상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사랑에 빠졌고, 사람에게 기대를 했고, 관계를 맺어나갈 수 있기도 했다. 이런 기대들이 없었다면 ‘굳이’ 뭐하러 힘든 사랑과 연애를 지속했을까. 나는 언젠가는 '내가 바라는 사랑'이 완성될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했던 기대들이 사실은 환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남편이 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나와 함께 있어주지 않고, 나와 대화를 나누지 않는 줄 알았다. 그래서 매일매일 마음 아파했던 것 같다. 사랑을 회복시키는데 골몰하느라 내 삶을 즐기지 못했고,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들로 상대를 더 도망가고 싶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저 나와 대화 방식이나 관계 맺는 방식이 달라서 그럴 수도 있는 건데, 아무리 사랑해도 서로 다르고 그것을 바꾸기 어려울 수도 있는 건데. 그 당시에는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고 그저 어서 감정을 회복시켜서 다시 알콩달콩한 관계가 되도록 내가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에만 몰두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나의 노력은 환상을 쫓았기 때문인지 현실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마음 아픈 시간과 외로운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내가 남편을 사랑한다는 것에는 일말의 의심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결혼을 일찍 했고 아이를 바로 낳지는 않았기 때문에 20대 중후반이었던 시기에 나를 미혼으로 오해하는 남자들이 있었다. 내가 미혼인줄 알고, 혹은 기혼인지를 알게 된 후에도 호감을 표현하고 다가왔던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 사람들을 좋아하거나 사랑하게 되지는 않았지만, 외로운 나에게 누군가 잘해주고 관심을 보여주는 것에 마음이 흔들렸다.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에 대해 남편에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게 싫다고, 나를 좀 붙잡아 달라고. 그러자 남편은 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네가 그러는 게 이해가 가. 내가 널 외롭게 했으니까.”

 

남편이 차라리 나에게 화를 내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따졌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나는 남편의 말을 듣고 더 허망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난 후 2~3년 남짓 지났을까, 남편의 출근 가방을 재미삼아 뒤적이던 아이가 증명사진 하나를 발견했다. 예전에 나도 함께 다녔던 회사의 여직원이었다. 남편은 당황했고 일단은 서둘러 출근을 했다. 출근하는 남편을 보내고 나서 나는 멍해지고 잘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에게도 그렇게나 마음을 주지 않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왜 나는 내 남편이 절대 바람을 피우지 않을 사람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을까. 남편도 사람이고 남자였고, 나와 몇 년간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었는데. 지인들 중 몇몇은 내가 결혼생활에서 겪는 외로움을 이야기하면 “남편이 바람 피우는거 아니야?”라고 물었었는데 나는 그때마다 절대 그럴리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남편이 출근하는 모습을 보고나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화가 나거나 속상한 기분이 드는게 아니라 차라리 뭔가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그렇게 소원하게 대했던 거였나 싶어서 차라리 납득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이상하지만, 별로 따져 묻거나 화내지도 않고 “한때 좋아했었는데, 이제는 아니야”라는 남편의 말을 듣고 그냥 큰일이 아닌 듯이 넘어갔다. 나는 남편의 마음이나 우리 관계에 대해 이미 체념을 꽤 많이 했었던 것 같다. 혹은 나도 외로움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흔들렸던 적이 있었으니 그래서 더 그 상황을 그냥 넘길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알게 되었다. 누구나 외로움이 길어지고 마음이 나약해지면 바람을 피울 수도 있는거구나 하고. 만약 내가 느끼는 부부관계가 만족스러웠고, 바람피우는 것은 남의 일인 줄만 알았었다면 나는 남편의 가방 속에서 나온 사진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사실 이 글은 외도에 대해 쓰려던 것은 아니었다. 외도나 배신을 포함해서 관계에서 우리가 갖게 되는 환상 때문에 더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에 대해 쓰고 싶었다. 남편이 나를 사랑해도 대화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나를 아껴도 나와 시간을 많이 보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나와 부부관계를 유지할 마음이 있다 해도 나를 소원하게 대할 수 있다는 것 등등에 대해 나는 용납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것들을 내가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었다면, 나는 그런 상황들에 대해 한발자국 여유를 가지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하루가 멀다 하고 외롭고 힘들다고 남편에게 호소하며 남편이 변화하기를 채근하는 대신, 나 자신을 좀 더 챙기고 회복을 하며, 관계를 좀 더 안전하게 회복시켜나갔거나 혹은 더 일찍 이 관계를 그만두었을 것 같다. 내가 했던 방식의 노력은 계속 상대와 나에게 상처를 주고 서로의 마음을 더 멀어지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람, 관계, 사랑에 대한 환상을 버리라”는 이야기다. 그런 환상을 다 내려놓고 나야지만 나의 외로움이 '받아들일만한 고통'이 되고, 그래야 상대를 덜 미워할 수 있게된다. 내 고통의 원인이 상대방 때문이 아니라 나의 욕구와 기대와 환상이 만들어낸 감정이라는걸 인정할 수 있어야 그 사람과의 관계에 분노하지 않을 수 있다. 고통, 배신감, 분노는 우리의 이성을 잃게 만들고 결국 소중한 사람, 소중한 관계, 소중한 사랑을 상처 입히고 잃게 만들 수 있다.

 

이 글을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외도를 정당화하거나, 외도가 옳은지 옳지 않은지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다. 외도가 누군가에게 미치는 커다란 상처나 배신감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싶고, 동시에 외도를 한 사람이 가지는 인간적인 나약함에 대해서도 인정을 하고 싶다. 이 두 가지 모두가 인정이 되어야 외도로 인한 고통의 늪에서 벗어나,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삶을 다시 안정화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관계의 어떤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대나 환상에서 벗어나, 나와 그가 가지는 인간적인 나약함에 대해 인정하며 이 관계를 바라볼 때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 관계를 잘 이끌어나갈 수 있는 것 같다.

 

‘애착관계’만큼 우리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도, 가장 비참하게도 만들 수 있는 관계가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가장 어렵지만 결국은 풀어내야하는 숙제가 이 ‘애착관계’인 것 같다. 그리고 이 숙제를 잘 풀어내고 행복해지려면, 각자가 자신의 살아온 역사로 인해 가지게 된 환상과 기대를 버리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것 같다. 환상과 기대를 버리는 것 자체도 상실이기에 슬픈 일이지만, 버리고 나서 얻을 수 있는 '따듯한 관계'와 '평온한 상태'에 대해 한번쯤 고민해 볼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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