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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치유와 회복
여우같은 여자가 될 수 있을까? 본문
여우같은 여자가 될 수 있을까?
나에게는 묘한 재주가 있다. 나에게 호감을 보이고 좋다고 다가오는 사람의 마음을 매우 빠른 속도로 식어 버리게 하는 재주.
이혼을 몇 달 앞두고 남편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 전에도 대화를 여러 차례 시도했었지만 잘 안되기가 일쑤였다. 나는 대화를 제대로 하기에는 서운함이 너무 큰 상태였고, 남편은 그런 내가 버거워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러니 대화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둘 다 마음을 먹고 이야기를 해볼 요량이었다. 집 근처 맥주 집에 앉아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서로 서운했던 것들을 이야기하고 풀어내야 되지 않을까? 오빠는 나에게 서운했던 게 어떤 게 있어?”
지금 생각하면 이 질문도 참 여우같지 않은 질문이었다. 나에게 불리한 상황을 또 만들어 버리고 말 그런 질문. 이 질문에 대한 남편의 대답은 나를 참 기가 막히게 만들었다. 만난 지 십년이 다된 이 시점에 남편이 서운하다고 말하는 사건은 연애 아주 초반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 외에 다른 건 욕실의 머리카락을 잘 안 치운다거나, 부엌에 신경을 잘 안 쓴다거나 하는 내 부주의함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몇 년의 시간동안 둘이어도 혼자인 것 같아 서운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스쳐지나갔다. 이 남자는 연애 초반의 몇몇 사건들 이후로 계속 나에게 거리를 두었던 것 같은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몇 년간을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 전전긍긍하면서 외로움에 몸서리를 쳤던건가?
오빠가 이야기했던 그 사건은 나도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2006년, 만난 지 두세 달쯤 되었을까, 오빠는 그 당시에 지방에 한 달 정도 연수를 가게 되었던 것 같다. 연애 초반 뜨거웠던 시기라 매주 주말 나를 보러 서울에 와주었다. 그날도 주말이었고 오빠가 도착할 시간에 맞추어 잔뜩 기대를 하며 예쁘게 보이고 싶어 정성들여 꾸미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갑자기 오빠에게 연락이 왔다.
‘오늘 갑자기 아는 형이 보자고 해서 못 만날 것 같아.’
자주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만나기 직전에 이런 식으로 약속을 취소한다는 게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일주일 내내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는데 그 형이 갑자기 만나자고 했다는 이유로 나와의 약속을 이렇게 쉽게 깰 수 있는건가? 물론 나는 지금도 약속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기 때문에 여전히 이런 태도는 이해하고 넘어가기가 어려운건 사실이다. 어쨌든 그 남자는 경상도 사나이였기 때문에(그 이유 때문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남자들끼리 당일 날 갑자기 만나자고 하는건 일상적인 일이었고, 선약이 있었다 해도 형이 보자고 하면 나가야했고, 심지어 그 선약이 여자친구였다면 그건 당연히 깰 수 있어야 했다.
나는 너무나 서운했지만, 일단을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 화장을 하고 나갈 채비를 거의 마쳤던 나를 거울로 보자 서운함이 밀려왔다.
‘미안하다는 말도 제대로 안하고, 나중에 언제 만나자고 얘기도 안하고. 아니, 형 만나고 나서 나 만나러 오겠다고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이때 나는 여우같은 여자가 되었어야했다. 즉, 이런 생각을 멈추고 여우같은 여자들처럼 화장하고 꾸민 게 아쉬우니 친구와 약속을 잡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오던가, 아니면 혼자서라도 나와의 선약을 파토 낸 사람에 대해 잊어버리고 내 시간을 기분 좋게 보냈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여우같은 여자가 못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속 끝나면 내가 있는 데로 와요. 그렇게 안하면 나는 이제 못 만날 것 같아요.”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나는 이미 마음이 상해버려서 ‘오늘 너무 보고 싶었는데 나 안 보고 싶어요? 우리 늦게라도 만날래요?’ 이런 애교스런 말은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나는 저렇게 통보하듯이 이야기하는 게 나의 서운함에 비하면 십분의 일도 표현하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상대는 달랐던 것 같다. 내 행동이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인 행동으로만 보였나보다. 결국 밤늦게 우리 집 앞으로 오기는 했지만, 나를 보고 웃어주지 않았다. 나를 보는 얼굴이 차갑게 굳어있었고, 아마 나에게 엄청나게 실망한게 분명했다.
나는 어쨌든 남자친구가 늦게라도 우리 집 앞으로 왔다는 것에 안도했고, 그래서 서운함도 풀렸다. 그래서 예전처럼 지낼 수 있는 말랑말랑한 마음 상태가 되었는데 문제는 상대방이었다. 내가 그런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것이 자신을 ‘굴복’ 시키려는 것처럼 느껴진 것 같았다. 나는 지금 생각해도 억울하다. 내가 ‘무리한’ 요구를 한건 맞지만 그래도 선약을 그렇게 가볍게 깬건 그 사람이었는데.
근데 이 일을 십년이 지나고 부부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하던 시점에서 이야기 했다는게 나에게는 의미심장했다. 그렇게 애걸복걸해도 보여주지 않던 속내를 드러내준 것 자체는 고마웠지만, ‘정말 이걸 지금까지 마음에 두고 있던 건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허탈해졌다. 내가 싸울 때 보였던 ‘여우같지 않은 행동’들을 다 마음에 두고 나에게 거리를 두었던 거였구나 싶어서 갑자기 아득해졌다. 감정적으로 행동한 것은 내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럼 원인 제공을 한 자신의 행동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건가 싶었다.
문제는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이게 되풀이된다는 것이었다. 이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이런게 아니라 그 전의 연애들에서도 비슷했다. 이혼한 이후의 연애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물론 내가 ‘정당하게’ 서운해할만한 일로 보통은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당당히 내 서운함을 “이성적으로” 혹은 “애교스럽게” 표현하는게 아니라, 일단은 참고 넘어가려다가 감정이 쌓이거나 삐져나오면서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으로 내 입장을 표현하는 것이 문제였다. 여우같은 여자들이 절대 하지 않을 행동들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화를 내거나, 사과를 요구하거나, 맥주를 끼얹거나(이건 내 생각에도 좀 심했다), 중요한 물건을 인질로 삼고 대화를 종용(이것도 심했다)하는 등 내가 생각해도 비이성적으로 굴었던 행동들을 뼈아프게 인정할 수 있다. 나도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인지라 이 글을 쓰는 내내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기도 하다. ‘남자들이 그렇게 행동하고 바로바로 사과했다면 내가 이렇게 이상하게 굴지는 않았을거라고.’ 물론 그렇다해도 내 행동이 정당화 되지 않는다는건 나도 잘 알고 있다.
어쨌든 이 글에서 전달하고 싶은 것은 나에게 있는 부정적인 관계 패턴이 나의 사랑을 다 망쳐왔다는 점이다.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결핍되어 있다고 느끼는 ‘애정 어린 관계’가 채워지는 것인데, 동시에 그걸 채울 수 없도록 만드는 치명적인 무기를 지니고 있다는게 가장 슬프다. 나의 패턴을 요약해서 간단히 말해보면, 누군가 나를 좋아하게 되고,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할 때쯤 상대로 인해 서운한 부분이 생겨도 나는 관계가 사라질까 표현하지 않고 참는다. 그러다 나의 인내가 한계에 달하면 ‘이성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표현하게 되고, 그러면 상대는 놀라고 나에게 거리를 두게 된다. 나는 거리감을 못 견디기 때문에 그 관계에 매달리게 되고 그래서 그 관계가 유지되기는 하지만 항상 내 입장에서 불리하고 외롭고 매달리는 관계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 결국 내가 바라는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관계’는 얻어낼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상담을 하면서 나와 비슷한 관계패턴을 보이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고, 남녀를 불문하고 애착 관계에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은 너무 유사한 관계 패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리하고 아픈 관계 패턴”이 나에게 가장 아프고 오래되어온 숙제였기 때문에 이 주제에 대해 수많은 책도 읽고 고민도 많이 해왔다. 가볍게는 ‘밀당의 법칙’에서부터 무겁게는 ‘애착 이론의 내적작동모델’까지 읽고 되새기고 연습해왔지만 내 오랜 관계 습관을 바꾸는데 에는 역부족이었다. 나의 무의식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를 사랑해줄 사람’을 찾는데 항상 혈안이 되어있다보니 아무리 공부를 하고 연습을 하고 다짐을 해도 누군가 나에게 호감을 보이는 순간 나는 이미 눈에 힘이 풀리고 호구이자 을의 태도를 갖추고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어도 똑같은 관계 패턴이 반복된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그래서 내 취향이 아니고 나와 대화가 통하지 않고, 내가 존경할 수 없는 남자와도 관계가 지속되었고, 심지어 내가 매달리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다행히도 예전의 내가 여우같음을 10도 못 갖추었다면, 이제는 60점 혹은 70점 정도를 줄 수 있을 만큼은 달라진 것 같다. 여전히 누군가가 나에게 호감을 표현하면 거절하기 어렵고, 상대가 마음에 안 들어도 연락을 먼저 끊지 못하고, 별로인 상대가 나를 무서워하게(?) 만드는 어이없는 시추에이션을 만들기도 한다.(예를 들면 썸 탄지 며칠 만에 여자친구처럼 연락 안한다고 잔소리한다거나..) 그렇지만 내가 그런 패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고, 어느 정도는 비이성적인 반응의 조절이 가능해졌고, 중요한 관계에서는 감정적인 반응이 훨씬 줄어들었고, 상대가 나에게 미안한 마음을 스스로 가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가능해졌다.
지금의 나라면 아마 전남편과의 십년 전 에피소드에서 속으로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겠지만 겉으로는 “그래, 어쩔 수 없지. 잘 놀다 와요.”라고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는 여우가 되는 법칙들에 나와 있는 데로 이틀정도는 연락이 와도 답을 하지 않겠지. 그 후에 내 기분이 풀리고 나면 연락을 취해서 내가 서운했던 점을 차분한 태도로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 여자들을 위한 수많은 연애 지침에서 이야기하는 게 다 이런 내용들이고, 상담자로서도 이 방법이 전략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으니까. 아니, 만약 내가 더 강력한 여우가 된다면, 그렇게 연애 초반부터 무성의하게 나와의 선약을 파토 낸 남자는 쿨하게 안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전남편과는 짧았던 1년의 연애 기간 동안에도 결혼하기에 적합한 남자가 아니라는 사인은 여러 차례 있었는데, 그걸 알아차렸으면서도 나는 계속 그를 만났고 내가 매달렸고 결국 결혼까지 했으니.
자신의 연애패턴, 관계패턴을 돌아보았을 때, 부정적인 패턴이 반복적으로 되풀이된다면 그건 애착관계에서의 트라우마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애착 트라우마가 치유되지 않고서는 건강한 패턴의 관계를 맺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언제 버림받을지 두렵고 불안하고, 나를 떠날까봐 전전긍긍하는 태도로는 관계에서 호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상대도 호구를 사랑해주지는 않는다. 애착 트라우마로 인해서 아예 관계 맺기를 피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이 외롭지 않거나 행복한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든 애착 트라우마로 인해 지금의 관계맺음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치유와 회복이 필요하다는 신호인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 맺었던 애착 관계는 어떠했나 되돌아보는 것이 지금 현재 관계를 해결하는 키가 될 수 있다. 고통스러워하며 비슷한 패턴을 되풀이하는 것에서 벗어나 조금씩은 더 나은 관계, 치유적인 관계를 맺어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분들이 서로서로 소통하며 응원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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